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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ST/최창재

최창재 展 _ 시간의 간극


2018.03.20(화) - 2018.03.24(금) 

12:00 ~ 18:00

 opening reception : 03. 24(토) pm 6:00



구성된 것과 해체된 것 사이에서


윤규홍(갤러리 분도 아트디렉터/예술사회학)


자본주의의 발달은 물리적 자본축적환경에 대한 과거 자본투자의 교환가치를 보존하는 것과 새로운 축적 공간을 개발하기 위한 이러한 투자가치를 파괴하는 것 사이의 갈림길에 놓여있다.(데이비드 하비)


 같은 이름으로 된 세 번째 전시가 벌어진다. 사진작가 최창재가 최근 3년 동안 1년에 한 번씩 <시간의 간극>이라는 제목으로 선보이고 있는 개인 전시는 앞으로 얼마나 더 이어질지 나로서는 당장 알 수 없다. 여기에는 새로운 신작을 포함하는 조금의 변화는 허용하되, 일관성을 세우려는 작가의 고집이 들어가 있을 수도 있고, 전환점 앞에서 뭔가 주저한 느낌도 있을 수도 있다. 시오 갤러리에서 열리는 이 개인전을 그의 작가 생애 안에서 일생일대의 전시로 치켜세울 욕심만 버린다면, 이는 꽤 중요한 전시다. 뭔가 하면, 지금 작가는 자신에게 있어서 아주 중요한 시간을 쓰고 있다. 그가 참여하고 있는 공공 예술의 기획 방향과 그가 작품량을 쌓아온 연작 <The City>가 형식적인 면에서 같은 방향을 향하고 있다. 바로 그 현재를 가장 가까이에서 드러내는 장소가 이곳이기 때문이다.


 그동안 우리의 해석은 ‘시선의 간극’을 작가가 스스로 밝힌 작품론에서 출발하는 쪽에 치우쳐 있었다. 뭐 그냥 관객의 입장에 머무는 내 안목에서는 그의 사진 세계를 좀 더 쉽게 풀어 쓰고 싶은 마음이 더 컸다. 간극이란 말이 우리나라 문예계에 바람이 확 불던 때가 있었다. 한국에 탈근대주의 사상이 수입되기 시작한 1990년대 초, 계간지 <외국문학>에 레슬리 피들러(Leslie A. Fiedler)의 논문이 소개되던 무렵이다. 대중문화와 순수문화 사이에 가로막힌 장벽을 피들러 교수는, 아니 그 텍스트를 번역한 김성곤 교수가 간극이라는 표현을 붙였다. 문학에서 많이 쓰이던 이 낱말을 나는 한동안 잊고 살았는데, 사진 전시에서 다시 마주하게 되었다. 간극은 둘 이상의 대상 사이에 거리를 둔다는 의미에서 쓰는 간격과 달리, 대상들이 각자가 향하고자 하는 극점을 두고 떨어져 있다는 뜻이 좀 더 강하지 않나? 


 최창재의 작품이 표현하는 간극도 두 개의 지향점으로 구분된다. 한쪽은 개발이라는 가치이며, 다른 한쪽은 보존의 가치다. 작가는 그 두 개의 논리를 카메라를 통해 관찰한다. 여기에는 대단한 뭔가가 사진으로 포착된다. 하지만 일이 잘못 풀리면 이 논점은 시시한 게 되어버릴 수 있다. 이는 물론 사진가의 잘못이 아니다. 사진기 탓도 아니다. 작품을 받아들이는 우리 수용자 집단이 가지는 문제다. 그동안 이와 비슷한 주제를 띄운 수많은 작품이 자신의 미학이나 사회적 당위성을 강조해왔다. 하지만 그 작업 대부분은 내가 보기엔 있으나마나한 선언들이다. 적어도 <시선의 간극>은 좀 달라야 하지 않을까? 다행히 간극으로 묘사되는 구도가 그 실마리를 품고 있다.


 그의 작품은 언뜻 보아 꽤 복잡하게 얽혀있다. 하지만 전체 구도는 굉장히 단순하다. 거기에는 이미 개발을 끝내어 앞으로 한동안은 변하지 않을 땅과 아직 개발이 이루어지지 않았거나 다 뭉개고 새로 개발할 땅, 이렇게 두 장소로 나누어져 있다. 그 사이에는 어떤 형태로든 담이 있다. 주로 낮에 촬영된 사진은 물리적인 깊이의 차이를 드러내지 않고 평면적으로 배치되어 있다. 그의 사진에는 잘 없는 게 있고 곧잘 있는 게 있다. 없는 것은 인물이고, 많은 것은 나무다. 주로 개발이 안 된 편에 나무가 있다. 나는 사람들이 <시선의 간극>을 인공 대 자연의 구도로 읽힐 것을 경계한다. 나아가 작가 또한 이따금씩 그렇게 개념을 혼동할까 걱정된다. 그 간극은 인공과 자연이 아니라, 제대로 갖춘 인공과 아직 덜 갖춘 인공이다. 우리가 도시 속에서 보는 나무는 인공물의 일부다. 산에 심은 나무, 들에 자라는 작물, 콘크리트로 가둔 강은 그 자체가 자연이 아니라 도시의 연장된 개념이다.


 우리가 그의 작품에서 관찰할 수 있는 또 하나의 사실은 사진에 담긴 그곳들이 익명성을 띤다는 점이다. 탈장소성이라고 거창하게 말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그냥 어딘지 쉽사리 알아차리기 어렵다는 말이다. 그 장소들은 아직 이름이 붙여지지 않았다. 거긴 몇몇 사람 이외에는 관심 바깥에 있는 평범한 곳들이다. 일반인들이 어떤 장소를 핸드폰으로 찍는다면 그곳은 아마 기억에 남겨둘만한 특별한 곳이지, 이런 곳은 아닐 것이다. 그렇지만 사진이 가진 여러 기술이나 예술적 의미에 집중한다면, 시선은 좀 더 넓어져 여기 최창재 작가의 로드뷰에 닿을 것이다. 익히 잘 알려진 대로, 카메라가 보급되고 성능이 좋아질수록 사진가들은 일반인들의 미적 행위와 차별되기 위해 다른 차원으로의 도약을 저질렀다. 피사체가 된 이곳들도 작가들이 찾고자 하는 탈출구의 전형이긴 하다.


 작가는 도시 경관의 해체와 재구성을 ‘비결정적 특성’이라고 이름 붙이고, 그 동력을 인간들의 욕망으로 풀이한다. 내가 보기에, 그가 쓴 비결정성은 그 말이 주로 쓰이는 신과학의 카오스 이론보다는 사회 제도에서 행정 개입의 한계를 가리키는 의도에서 가지고 온 게 아닐까 추측한다. 예컨대 공적인 규제를 피하고자 하는 개인 행위자의 사적 이윤 추구는 재개발 열풍이나 아파트 숲과 같이 시각적으로도 특별한 결과를 이끌어낸다. 사회과학자들과 자연과학자들은 그 패턴의 상당부분을 이미 밝혀내고 있다. 가령 은하계 군집의 패턴이나 주식 시세, 미술작품 가격과 정당지지율, 도심 교통량 등과 같은 ‘비결정성’에 닿은 현상에 관한 연구는 통섭된 탐구 방법으로 접근이 가능하다. 작가의 문제의식 또한 지리학과 사회학에서는 예전부터 공유되어 온 주제다. 서두에 밝힌 데이비드 하비의 고색창연하지만 간결한 분석이 그 예가 되겠다. 하지만 예술가와 과학자가 같은 세계를 보며 풀어내는 방법은 다르다. 사진 속 담벼락이 현실 속에서는 법을 등에 업은 강제적인 개입이지만, 그의 예술 속에서는 인지의 중재를 위한 장치가 된다. 그래서 말인데, 몇 가지 특별한 절차를 통해 경계 구실을 하는 담을 시각적으로 더 환기시키는 기법을 궁리하면 좋으리란 생각은 내 욕심인가?


 그가 플레임 속에 넣지 않은 나머지 바깥쪽 경관이 궁금하다. 행정가나 과학자는 일체의 공간에 대한 통제나 분석을 욕망하지만, 이 예술가가 가진 원칙적인 희망은 화면 구성과 배치에 대한 완성이다. 스스로를 비주얼 아티스트라고 칭하는 최창재는 자신만의 눈으로 세계를 재단하고 해석하길 원한다. 이 또한 현실에 대한 발언이다. 동시에 이는 순수한 예술 행위이기도 하다. 우리가 어느 쪽으로 그의 작품으로 보더라도 상관없다. “문학 비평의 역사는 곧 오독의 역사”라고 폴 드만(Paul DeMan)은 말했지 않나. 최창재 역시 관객들이 자신의 작품을 오독하길 원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것도 아니라면, 그는 예술과 예술이 아닌 것 사이에 걸친 간극을 자신의 작품을 메타포 삼아 보여주고자 하는 것이 아닐까.